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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후의 건축

2009/12/29 20:17, 글쓴이 잡종
내가 일하는 회사가 입주하고 있는 건물은 20년이 좀 넘었다.
그래도 당시에는 초고층, 초현대식 건물이라고 관심받았던 건물로, 지금도 꽤 쓸만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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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예술로)

요즘 지어지는 초고층 건물처럼 늘씬하고 잘빠진 걸그룹의 느낌은 아니지만,
근육질의 튼튼한 하체로 서 있는 늠름한 모습이다.
외관은 직육면체의 단순한 모양이 아닌,
모서리마다 살짝씩 trim을 주었고, 고층부에도살짝 얇아지는 형상으로 단조로운 shape을 피하였다.
창문의 검은 부분과 테두리의 밝은 베이지색이 지나치게 두껍지도 얇지도 않게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통일성을 부여하면서도 적절한 비례감을 주어 세련된 느낌을 준다.
특히 밤이 되면 듬성듬성 창문에 빛이 새어나와 랜덤한 무늬를 만들어낸다.

한강변에 위치한 건물은 네 면이 전부 노출되는 위치에 있어
특별히 파사드(facade: 건물의 정면)가 없는 형태로, 네 면이 전부 균일하다.
강변을 따라 규칙적인 비례의 패턴이 펼쳐지는 모습이 안정적인 모습이다.
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눈에 들어오는 점잖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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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지 트윈타워는 동쪽의 63빌딩, 서쪽의 국회의사당과 함께 여의도의 랜드마크로서 오피스 빌딩군 중에서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보화 시대를 선도하는 그룹의 본부로서 기술집약적 미래의 빌딩답게 건물의 관리 기능, 정보 전달, 사무자동화 등을 체계적으로 조합시켜 능률적인 업무 수행과 아울러 안정성과 에너지 절감을 극대화시켰다. 또한 단순한 외관을 탈피하고자 돌출창 벽면과 상부의 캐스케이드형 입면 처리로 입체적인 효과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 예술로, 엘지트윈타워 소개 내용 (링크)

트윈타워, 일명 쌍둥이빌딩은 당시 '서울특별시 건축상 은상'을 수상한 작품.
멋진 건물의 모습을 보자.
(사진 출처: 예술로)

전면 중앙 출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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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아트리움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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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리움에 입장하자마자 보이는 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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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출창과 사각의 통일과 변형이 조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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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리움 계단. 당시 초현대식 건물답게 유리와 스틸 느낌으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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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상, 공간상의 제약으로 인해
우리가 직접 체험하지 못하는 건축물들은 위의 이미지와 같이
주로 건축 잡지나 작품집 등을 통해 습득된다.
이미지들은 갓 지어진 후 일반 사람들이 이용하기 전에 잡지 등에 실릴 목적으로 찍힌다.
건축가의 의도가 온전히 반영되어 있는 유일한 순간으로, 건축물 자체로서 완결된(!) 모습을 보여준다.

직접 가보지 않아도, 이미지들은 우리의 눈을 매혹시킨다.
정돈된 이미지들과 완결된 형상들은 훌륭한 건축의 모습이다.

명품 건축은 이렇게 탄생된다.
도시와 역사의 컨텍스트, 독특한 형태와 외관, 외관만큼 화려한 실내 인테리어, 친환경적인 구조...
우리는 이런 건축물에 상을 수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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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는 규모가 작고 직원도 많지 않은 회사에 다니다가,
어찌저찌하여 한강변의 늠름하게 서 있는 건물에 입주한 나름 큰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도 큰 회사(일명 대기업)에서 일한다는 안정감과,
비즈니스의 변방에서 중심가의 메인스트림으로 진출한다는 뿌듯함,
그리고 누구나 아는 그 유명한 건물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예를들면, (지금은 없어졌지만) 뉴욕 월스트리트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서 근무하는 느낌이랄까.

부푼 마음을 안고 처음으로 출근하는 날,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나는 양복 차림의 아저씨 부대들이 우르르 몰려서 공장..아니 건물로 줄지어 들어가는 풍경이었다.
이전 직장들은 직원수가 적은 회사인데다가, 젊은 직원들이 많았고,
복장이 자유복장이라 다들 캐쥬얼한 개성있는 차림으로 출근을 했었다.
반면 여기는 똑같은 색깔의 양복 차림을 한데다가,
대부분이 아저씨들이었고 (양복 차림때문에 실제 젊은 애들도 전부 아저씨로 보인다.)
통근 버스로 비슷한 시간에 회사 앞에다 쏟아부어주니,
마치 뤼미에르 초기 영화인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1895)'에서나 봄직한
출근하는 노동자의 모습들로 비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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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음 영화 정보)

다른 하나는,
한꺼번에 공장으로 몰려들어간 양복입은 아저씨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수십미터(정말 수십미터이다!) 줄을 서 있는 모습이었다.

33층짜리 건물인데, 나름 합리적으로 층을 세 부분으로 나눠서 엘리베이터를 운영한다고 한 것이,
6~15층, 15~24층, 24~33층... 각 9개 층씩 공평하게 균등해놓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고층으로 올라갈 수록 엘리베이터가 왕복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니
층 배분을 저층 11개층, 중층 9개층, 고층 7개층 등으로 나눠야 대략 시간이 맞았을 거라는 생각이다.

오피스 빌딩은 저층이 로얄층이다.
방금 말한것처럼 왕복 시간이 짧은 저층일수록 돈 많은 좋은 회사들이 입주해있다.
돈 많은 좋은 회사는 직원들의 쾌적한 근무 환경을 위해
일인당 점유 면적이 다른 회사들보다 많이 할당된다.
반면 고층에 입주하는 회사들은, 고층에 들어간 자체가 상대적으로 돈이 없다는 것이고
돈이 없으니 직원 일인당 점유 면적이 저층에 입주한 회사보다 높을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저층부의 근무 인원이 제일 작고, 중층부, 고층부 순으로 근무인원들이 많아지는 식이다.
게다가 엘리베이터가 균등하게 배치되어 있으니,
고층부 사람들일 수록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줄서서 기다려야하는 시간이 그만큼 길다는 소리다.
(아, 흥분했다. 난 고층부에 근무한다;)

20년 전 건물이 지어졌을 당시에는, 인간들이 이렇게 많을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입구는 작아서 입장할때에도 줄을 서야하고,
쓸데없이 회전문만 많고(실제로 출퇴근 시간에는 회전문을 아예 열어놓는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로비 구석에 시냇물이 흐른다(!).
일과 중 가장 많이 이용하는 지하층으로 이동하는 동선은 너무나 길고 계단은 비좁으며
지하로 내려가서도 동선이 비효율적이다.
2~5층까지의 상업 시설을 이용하는 동선은 오피스 근무자들과 겹쳐 항상 혼잡하고,
보안 검색대 때문에 가까운 거리도 멀리 돌아가야만 한다.
사무 공간 극대화를 위한 ㅁ자의 특색없는 공간 구조로,
한 층만 내려가도 사람을 찾기 위해서는 한바퀴 뱅뱅 돌아야한다.
당시 최첨단 중앙집중식 건물 관리 시스템으로,
프로젝터를 틀어 회의실 불을 끌라치면 한 섹션이 전체 불이 꺼지고,
어찌나 채광에 신경을 썼는지 버티컬 블라인드도 소용이 없다.

사실 짓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일순간이지만, 세우고 난 뒤에는 훨씬 더 긴 시간이 남아 있다. 짓고 나서부터가 시작이다...... 건축물과 사는 사람들의 생활은 계속 변화하지만, 건축물을 변화시키거나 돌이킬 수 없다....... 건축이 살아 있는 시간은 결국, 지은 뒤에 남는 그 이야기들이다...... 20세기의 개인 주택, 공공사업 가운데 몇 퍼센트가 이러한 각오로, 뒤에 남는 이야기를 고민하고 지어졌을까?            
- 쿠마 켄고, '약한 건축', p.28

해질녘 붉은 석양이 내려앉으며 잔잔한 물결에 반짝이며,
자신의 자태를 차분하게 감추며 조용히 불빛을 반짝이는 멋진 풍경을 만들어내는 건축......
인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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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서울공식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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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잡지나 작품집을 통해 감명을 받은 건축물들은 꼭 가보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지면상 사진에 표현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 호기심도 있고,
실제 눈으로 보고, 걸어다니면서 경험할 때의 아우라를 느끼고 싶은 욕구도 있다.

잔뜩 기대를 하고 건물을 찾아간다.
저 멀리서부터 살짝씩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걸음 한걸음씩 다가가며 나타나는 모습들은
사진에서만 보던 환영의 이미지가 아니다. 실재의 내 눈앞에 현전하는 광경이다.
가까이 다가가니 건축물 바로 앞에 기념품을 파는 가게와 매점들이 들어서있다.
사람들이 북적댄다.
작품집에서 본 view를 찾아 사진을 찍으려니, 사람들이 가리고, 가게들이 함께 찍힌다.
인간들에 거슬려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이놈의 인간들. 어디로 좀 안 없어지나..

사실 작품집에 실린 사진들은 일반 사람들인 우리들은 접할 수 없는 모습이다.
우리가 그 건물을 보러 갔을 때는, 이미 인간들로부터 침략(!) 당해 사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테니까.

지어질 때 아무리 멋진 건축물이었다하더라도,
그 건축물을 실제 이용하는 사람들과 그 주변의 영향을 주고받는 사람들과 조화되지 않는다면
그 건물은 잘 된 건축물일까.
좋은 건축물로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갓 지어졌을 때 건축가와 비평가들로부터 칭찬받으면 좋은 건축물이 되는걸까.
건축의 좋고 나쁨을 평가받는 것은
건출물 자체로서 완결성을 가질 때의 모습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들어차서 이용하고 있는 상태의 모습일까.

사람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피어날 수 있다. 아니, 그것이 정상적인 모습이다.
지금껏 그러지 못했던 것은 사람과 집, 그리고 풍경 사이에 심각한 부조화가 있었다는 증거다.
- 김억중, '나는 문학에서 건축을 배웠다', p.141,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건축물의 존재 이유는 당연히 사람을 위한 것이다.
사람이 편안하고 즐겁고 안전하게 이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쉽게 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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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 지 20년. 내년부터 리노베이션에 들어간다고 한다.
부디 사람을 잊지 말아주기를.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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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9 20:17 2009/12/2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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